작년 겨울, 현준이와 싸운 후 각자의 시간을 갖자고 통보한 적이 있다. 아마 별 시덥지도 않은 일로 싸웠던 것 같지만, 계속되는 마찰에 몹시 지쳐있었다. 왜 매주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질까? 어떤 일련의 과정에서처럼 나는 1)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2) 일기를 쓰며 자가진단을 하고 3)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치료법을 궁리했다.

내가 완전무결한 천년의 사랑에 강박을 가지고 있다는 진단결과가 나왔다. 완벽한 상대여서 마찰도 없는 그런 관계를 요구하니 서로 고통받을 수 밖에 없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진심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사람의 본질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현준이의 본질을 이해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문득 미안함이 흘러나왔고 다시 현준이가 보고싶었지만, 쑥스럽고 무안한 마음에 연락을 다시하기가 어려웠다. 뭔가 은유적으로 멋지게 마음을 전해보자는 오글거리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뜬금없게도, 특별한 유전자를 조합하여 태어난 인구가 자연적으로 태어난 인구를 넘어서는 미래를 배경으로 SF 단편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에 도취한 나머지, 업무시간에 높은 파티션을 방패 삼아 열심히 일하는 척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우리의 모든 결정이 정부의 알고리즘과 백데이터를 통해 정해진다는 진부한 설정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본질, 그리고 사랑이라는 고유함이 주제였다. 싸운 와중에도 글에서 허세를 부린 것이 놀랍지만 어쨌든 그랬다.

현준이는 그 글을 받고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내가 고민하는 문제를 글에 투영하고 창작해나가는 과정은 내게 좋은 치료였다. 영화 매트릭스를 좋아하고 인생은 시뮬레이션이라고 생각하는 내 남자친구에게 또 오글거리는 SF 단편을 안겨주어 괴롭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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